직장인, 워킹맘, 대학원생, 서른 중반의 저질 체력. 나를 규정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취미생활을 간소하게 만든다. 여유시간이 생기면, 가족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학기 중이라면 산더미 같은 과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짬이 생기면, 넷플릭스에서 미드를 보는데 최근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면서 나의 직장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에밀리(주인공)는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에서 일하게 되는데, 일을 좋아하는 에밀리가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프랑스 직원들은 그녀를 따돌린다.
"난 미국인이 싫어요. 일하기 위해 살잖아요. 우린 살기 위해 일해요"
"난 일이 좋아요. 성취감도 좋고요, 행복해지거든요."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요? 행복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닐까요?"
최근 9년 이상 다닌 회사에서 퇴사했다. 일을 하면서 행복했던 적 있던가. 작은 성취에 보람을 느끼고, 예전보다 일을 더 잘하게 될 때, 성장에 감사했지만, 행복한 적은 없었다. 그 성취감과 보람이 행복이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9년 다녔던 회사는 칼퇴가 보장되고, 회식이 없으며, 회의도 없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좋은 회사였다. 그러나 500명 이상의 대규모 기업이었음에도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소소했고, 나는 그 여유에 죄책감을 느꼈다. 실장님과 상담을 했는데, 일이 별로 없으면 대학원 과제를 하라고 하셨다. 남들은 다 일하는 상황에서 대학원 과제를 하도록 배려해주시는 실장님.... 그렇지만 회사 일을 하나도 모르고,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에는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은 고착화되고 있었다. 인사팀에 있어도 인사안을 모르고, 경영계획을 모르는데 교육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020년 12월 2일 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1년 만에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해서 아직도 얼떨떨하다. '노무사로서 살 것인가, 이 여유에 적응하면서 살 것인가' 고민했다. 대학원을 졸업하지 못했고, 아이는 아직도 유치원생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상황보다는 나를 믿고 변화를 선택했다.
'단순히 내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12월 18일 퇴사했고, 12월 21일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첫 출근날부터 일을 할 수 있어 좋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치 보는 상황이 아닌 점만으로 충분했다.
일은 일이고, 일은 노동이므로 재미있을리 없으며, 사람의 성장보다는 조직의 성과가 우선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여러 기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부속품처럼 대하거나, 원칙과 규정만을 고집하고, 성과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노력은 원리, 원칙 때문에 무시당하기도 하고, 개인의 성장은 직책이나 연봉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이상적인 이야기는 쉽게 사라지며, 관행은 늘 남아있으므로, 조직의 변화는 어렵다. 버티는 삶을 선택한 직장인들에게는 일의 의미보다는 건강이 최고의 가치가 되며, 칼퇴와 워라밸만 있다면 괜찮은 회사가 된다. 무엇 때문에 일을 해야 할까? 물론 돈 때문에 일하고, 당장 대출금 때문에 일하며, 카드값을 메꾸기 위해 일한다. 그렇지만 내 삶의 대부분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게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일이 좋다는 건 야근과 휴근을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정정하면... 나는 '일다운 일'이 좋다. 일다운 일이란 일을 하는데 의미와 재미가 있고,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일이 끝난 지점에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다. 최근 수습처를 구하면서 다양한 면접 후기를 보았는데, 아직도 '연장근로가 많은데 괜찮겠냐'라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연장근로는 정말 싫다. 그렇지만 아무 일 없이 언제 시간이 가는지만 기다리는 삶도 싫다. 언젠간 연장근로를 하지 않고도 일을 잘하게 되는 날이 올까,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난 쉽고 정신적으로 괴로운 삶보다 어렵고 힘든 삶을 선택하였다. 그 선택의 대가가 무엇일까?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위해서!
소소의 브런치:
성장에 목말라, 직장인 10년차 초보 노무사가 되었습니다. 소소하지만 소름 끼치는 에피소드를 전달합니다. 일이 무엇인지, 노동의 가치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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