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은 칼퇴가 아니다
노무사 동기 단톡방에서 <워라밸 일자리 장려금>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별 지원금이 다 있구나, 호기심에 정부24에 검색해보았다.
워라밸 일자리 장려금: 전일제로 일하던 근로자가 필요한 때(가족돌봄, 본인건강, 은퇴준비, 학업 등)에 일정 기간 소정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사유가 해소되면 전일제로 복귀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사업주를 지원함으로써 일과 생활의 균형에 기여
쉽게 말하면, 근로자가 개인사유로 단축근무를 신청하여 회사가 허용할 경우, 사업주에게 지원금을 제공하는 제도이다. 고용노동부는 워라밸을 위한 조직문화로 정시 퇴근, 퇴근 후 업무연락 자제, 생산성 위주의 회의, 건전한 회식문화, 연가사용 활성화 등등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늘 정시 퇴근을 했고, 부서에는 회식과 회의가 없었으며, 연차를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음에도 워라밸은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퇴근 후에도 우울할 때가 많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양적 균형이 아니다. 나는 워라밸은 ‘노동의 질’이 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노동의 질’은 누가 정할까? 바로 동료이다.
회사의 창립기념일 행사를 진행할 때였다. 나는 우연히 블로그에서 <캐리커쳐 상패>를 알게 되었고, 근속상 대상들에게 캐리커쳐 상패를 제작하여 전달하기로 했다. 100여 명 넘는 사람들의 개인 사진을 받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만족한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기분이 좋을 ‘뻔’ 했다. 그러다 메일을 받았다.
캐리커쳐 상패를 준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이건 내 얼굴이 아닌 거 같아요.
갖다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참을까 하다가 메일 남겨요.
그럼 수고해요.
메일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버리고 싶으면 버리면 되지, 굳이 내게 메일을 전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메일을 준 부장은 근속 30년의 대선배였고,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역시나 집에 가서도 생각이 났다. 신랑한테 얘기하면서 화나고, 자려고 누워도 생각이 났다. 그렇다고 메일에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건 더욱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그분을 만나고 말았다.
“00 씨죠? 메일 보냈는데 답이 없길래요,
기분 상하라고 보낸 건 아니에요, 나도 보내고 나서 찜찜하더라고.
근데 별로라고 말해준 사람이 없을 거 같아서. “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때는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면, 두 번째 마주쳤을 때는 가슴을 주먹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늘 칼퇴했고, 회의와 회식은 여전히 없었지만 더러운 기분은 5월 내내 이어졌고, 결국 창간 행사에 다신 캐리커쳐 상패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만족한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들은 자기들 페북에 사진을 올리거나, 카톡 프사에 자랑하기 바빴고 나에게 직접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 사람은 친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일을 통해서 남에게 기쁨을 주려는 노력은 단 한 사람의 불평 때문에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일의 가치는 가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일의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다.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KPI가 있는 경우에도 그 지표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목표를 정하고, 이것을 측정하는 모든 기준은 사람이 정하기 때문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목표 달성만이 내 일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개인의 노력을 알아봐 주는 동료가 있을 때, 그리고 고생에 보답받는 느낌이 있을 때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워라밸은 칼퇴일까? 노노! 워라밸은 동료 수준이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궁금하다, 부장님은 왜 나에게 메일을 보냈을까?
소소의 브런치:
성장에 목말라, 직장인 10년차 초보 노무사가 되었습니다. 소소하지만 소름 끼치는 에피소드를 전달합니다. 일이 무엇인지, 노동의 가치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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